우주에도 휴지통이 있다면
저녁을 먹고 책상에 앉았는데, 컴퓨터 바탕화면 구석의 휴지통 아이콘이 눈에 들어왔다. 지운 파일이 가득 차 있는 휴지통.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우주에도 저런 휴지통이 있지 않을까.
일을 하다 보면 기록이라는 것이 참 질기다는 걸 느낀다. 장부의 한 줄을 지워도, 지웠다는 흔적은 남는다. 파일을 휴지통에 넣어도, 언제 누가 무엇을 했는지는 어딘가에 로그로 쌓인다. 컴퓨터라는 건 결국 세 가지로 굴러간다. 돌아가는 프로그램, 모든 것을 적어두는 데이터베이스, 그리고 쓸모를 다한 것을 치우는 휴지통.
그 세 가지를 떠올리다가, 우주가 머릿속에서 하나씩 겹쳐지기 시작했다.
먼저 프로그램. 우주가 거대한 컴퓨터에서 실행되고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상상은 이제 꽤 익숙하다. 별이 태어나고, 행성이 돌고, 사람이 웃고 우는 이 모든 일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한 프레임씩 계산되며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데이터베이스. 예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아카식 레코드’라는 것이 있다.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일, 누군가의 생각과 감정까지 어딘가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는 신비주의의 오래된 상상이다. 영적인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프로그램 옆에 놓고 보니 이것만큼 데이터베이스에 어울리는 이름도 없었다. 실행 중인 우주가 쉬지 않고 남기는 로그를, 옛사람들은 영혼의 도서관이라 불렀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은 휴지통. 여기서 블랙홀이 들어왔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곳, 수명을 다한 별과 물질이 사라지는 곳. 프로그램이 쓸모를 다한 데이터를 거둬들여 부수는 휴지통이다. 블랙홀도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에너지를 내보내며 줄어든다고 하니, 그건 휴지통을 비우고 그 자리를 다시 우주가 쓸 수 있는 공간으로 돌려놓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세 조각을 나란히 놓는 순간,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카식 레코드는 메인 데이터베이스. 시뮬레이션 우주는 실행 중인 프로그램. 블랙홀은 휴지통이자 자원 회수기. 따로 떨어져 있던 신비주의와 우주론과 천체물리가, 하나의 운영체제 안에서 각자 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 운영체제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삭제와 기록이 서로를 보완한다는 점이다. 프로그램 속 별 하나가 블랙홀로 들어가 형체를 잃어도, 그 별이 빛났던 이력은 이미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있다. 실물은 휴지통에서 부서지지만 기록은 지워지지 않으니, 우주는 무엇 하나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시스템이 그 기록을 불러내 전혀 다른 좌표에 다시 그려낸다면, 사람들이 상상해 온 화이트홀이나 웜홀은 바로 그 복구 작업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오니 조금 더 멀리 가 보고 싶어졌다. 사람도 결국 이 운영체제 위에서 돌아가는 데이터라면, 우리가 떠난 뒤에도 우리가 웃고 고민하던 순간들은 메인 데이터베이스 어딘가에 로그로 남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로그를 읽고, 누군가는 그 로그로 새로운 무언가를 그려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하루를 조금 더 성실하게 기록하고 싶어졌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상상이다. 블랙홀 안에서 정보가 정말 사라지는지는 물리학자들도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한 문제이고, 화이트홀이나 웜홀은 이론 속에만 있는 존재다. 그래도 서로 다른 세 이야기가 이렇게 딱 들어맞는 걸 보면, 사람은 오래전부터 같은 구조를 다른 언어로 그려 온 것 아닐까 싶다.
그러다 문득, 이 이야기를 언젠가 소설로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우주의 데이터베이스를 열람할 권한을 얻게 된 한 사람. 블랙홀로 사라진 별의 기록을 되살리려는 누군가와, 그것을 막으려는 시스템.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인물과 장면이 되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직은 메모 몇 줄에 불과하지만, 이 운영체제 위에서 어떤 이야기가 돌아갈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화면 구석의 휴지통을 다시 봤다. 비우기 버튼을 누르려다, 오늘은 그냥 두기로 했다. 어차피 기록은 남을 테니까.
G.S.KIM